더치페이
글쓰는 것을 업(業)으로 삼은지도 이제 10년 째다. 돈되는 본업은 따로 있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사명감마저 주어지는 이 직업의 매력에 매료된지도 오래다. 하지만 이도 세월이 흐르는지라 매료는 무료로 바뀌었고 난 신선한 자극을 찾아야 했다. 그 대안이 소개팅이었다.
아는 동생 소개를 받아, 식당을 예약했다. 메뉴는 똑같다. 스테이크, 파스타.
못해도 한 5~6만원 나올 테지만 계산은 당연히 내가 할 것이다.
그녀는 이후 1만원 정도 나오는 커피값을 낼 것이다. 아니면 커피도 안 마시고 헤어지거나.
이제껏 소개팅을 하며 밥먹고 더치페이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왜 더치페이를 안 하느냐? 사실 합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이유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이와 만난다면 밥값 뿐 아니라 집세까지 내줄 수 있는데 아직 일면식도 없으니 그렇지도 않다. 그냥 관습이니까 낸달까. 솔직히, 안 내면 그 여자에게 없어보일 것 같아서다. 쪼잔하다 욕먹을까봐. 더치페이 하자고 했을 때 받게 될 그 따가운 시선과 의뭉스러운 오해를 견딜 깜냥도, 자신도 없다.
사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간다. 남자가 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럼에도, 없어 보일까봐, 쪽팔려서 더치페이하자는 말은 못 하겠다. 온라인은 왜 더치페이 안 하냐 난리지만 내 주위 그 어느 놈팽이도 이 문제로 이의를 제기한 기억은 없다. 나를 비롯해 내 주위 남자, 여자들은 모두 이런 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냥 그러려니 안도하면 편하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혼자 튀면 좋을 거 뭐 있나.
그런데,
이 정신으로 글은 잘 써질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이란 의식을 구획하고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로 내 진심을 툭 풀어놓는 작업일진대, 이 정도도 말하기 쪽팔리다면, 머리로 이해가지 않는 관습을 따라야 한다면, 내 명예/직업을 거는 글을 쓸 때에도 당연히 관습에, 타성에 젖게 되지 않을까?
아주 사소한 고민에서 출발한 물음은 내 직업 윤리에까지 메스를 들이댔다.
머리가 하얘지기에 난 이이상 환부를 헤집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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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이런게 인문학인가요 철학인가요 사고과정이 멋있네요
형님 항상 글 인상깊게 읽고 있습니다.
오늘 글도 인상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