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차 [385854] · 쪽지

2012-09-22 17: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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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미국이 기밀 해제한 보도연맹 양민학살 사진 자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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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이란, 1949년 6월 좌파 전향자들로 구성된 반공단체로, 그 요직을 장관들과 지검장들이 나누어가져 사실상 관제 단체나 진배 없었습니다.

전해인 1948년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국가안보법의 영향으로, 1949년 말에는 보도연맹 가입자수가 30만명이 넘어갔습니다.

전술한데로, 원래 보도연맹은 좌파 전향자들로 구성된 것이라, 그 가입자 역시 좌파 전향자여야 했지만, 지역할당제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 때문에 좌파와 무관한 일반 국민들에게 가입을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 했습니다.
비료를 준다는 말에 가입한 농민, 식량 배급을 준다는 선전 때문에 가입한 양민, 고무신 준다고 해서 가입한 경우가 비일비재 했습니다.

이는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중도파나 힌국독립당 같은 우파 정당, 미군 철수를 주장한 소장파 등등 좌파와 상관 없는 국회의원들 까지 반강제로 가입되었습니다.

심지어 10대 중고등학생들까지 가입된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이승만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북한군에 협조 할 수 있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도 연맹 가입자들이나 양심수들이 북한과 내통하고 배신할 수 있다는것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생각이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의심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승만의 의심은 경찰과 서북청년단들을 동원해 북한군에게 점령되지 않은 남부지역의 보도 연맹 가입자들을 색출해내고 즉결처분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는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관된 명령체계하에서 진행되었음을 입증하는것이기도 합니다.

이천에서 100여명, 대전 교도소에서 3,000여명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양민 학살이 진행됩니다.

보도연맹 양민 학살을 주도적으로 실행한 것은 육군 특무대 (CIC)와 헌병대들이었습니다.
학살 피해를 극심하게 본 것은 당시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지역이었으며, 이들 학살의 주체들에 의해 산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양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시켰습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국제적으로 비난이 일고, 미국도 민간인을 죽이지 말것을 경고하자,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보도연맹 학살 중지명령을 내립니다만, 이미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된 뒤였습니다.

현재로써는, 보도연맹 양민학살로 인한 피해자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최소 20만명에서, 최대 50~100만명이 학살되었을거라고 추산 되고 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와 학살의 주체였던 군인들과 경찰들은 철저하게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은폐-엄폐-조작 하여 금기시 합니다.

전향한 좌익들이 가입하는 보도연맹에, 실적에 눈이 어두운 공무원들이 10대 아이들과 양민들, 그리고 국회의원까지 반강제로 가입 시켰고, 좌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 대부분의 양민들은, 단지 고무신, 비료, 식량배급 때문에 가입한 보도연맹 때문에 적군이 아닌 국군과 경찰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학살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6.25 전쟁이 휴전되고도 한동안,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자신에게 '빨갱이'표가 붙을까봐 감히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지를 못했습니다.

1960년 4.19 의거를 통해 이승만이 쫓겨난 후,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항의를 했고, 당시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진행하여, 가장 학살이 심했던 경상도 지역의 학살 장소를 돌며 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보도연맹 양민 학살사건의 진상조사는 중단되게 됩니다.
이 뿐만 아니라, 박정희와 군사 쿠데타 세력들은,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양민의 유골을 수습한 유가족들에게 소급법을 만들어 '빨갱이'로 내몰거나, 혁명재판이라는 미명하에 보도연맹 양민 학살 피해 유가족들을 입막음 시킵니다.

이후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은, 보도연맹 양민 학살 피해 유가족들을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하여 감시하였으며, 이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오랜시간동안 옥죄였습니다.
아울러, 보도연맹 양민 학살과 관련된 정부 기록들을 모두 소각하여, 진상을 완전히 은폐시켰으며, 민주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보도연맹'은 철저히 금기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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