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작년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10월이 거의 다 끝나가고, 수능 또한 가까워져 온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현역이라면 이제 눈 깜빡하면 수능날 아침이고, n수생은 시간이 죽도록 느리게 가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조금 전 서랍장을 뒤지다 작년에 사용하던 학습기록장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재수학원에서 사용하던 생활기록장이었지만. 무언가 적는 걸 극도로 귀찮아해서 한 번도 스케줄러를 사용해본 적 없던 내가 일년동안 소중하게 다뤄왔던 A4사이즈에 짱짱한 하드커버 기록장이었다.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열심히 나의 일상(이래봤자 재수학원에서 시작해서 재수학원으로 끝난)을 전부 적었을까. 정말 그 일년동안 난 말 그대로 ‘홀렸었다.’ 내가 다니던 재수학원에, 그리고 우리 담임선생님한테. 이 글을 작성하고 조만간 오랜만에 학원에 얼굴이라도 비추러 들를 생각이다. 이맘때 즈음이면 담임선생님도 오르비에 자주 접속하실 테니까, 이 글을 읽으실진 모르겠다. 물론 읽으시면 단번에 내가 누군지 알아보실 거다. 읽으셔도 안읽으셔도 딱히 상관은 없다. 그냥 이것저것 의식의 흐름 따라 늘어놓고 싶다.
정말 치열하게 준비하고 갈망했던 외고 입시에서 패배하고, 어리석게도 공부에 이골이 나버린 나는 일반 인문계고로 진학한 이후로 중3시절만큼 열심히 공부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3등급의 내신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대학. 그래도 모의고사는 공부를 안 해도 좋게 나오길래 앞뒤 생각 없이 놀기만 했다.
의지박약 컨테스트를 연다면 아마 랭커는 가볍게 찍을 나는 다행히도 나의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많고 많은 재수학원들 중에 가장 관리가 철저하다는, 도심속의 기숙학원이라는 푸른소나무 학원에 들어갔다. 현역때 언수외를 개죽쑨건 아니라 강남의 큰성공학원 이런 데에 들어갈 순 있었지만, 과감히 뿌리치고 일종의 도박을 건 셈이었다. 재수학원을 이리저리 다녀보며 내가 직접 고른거라 걱정도 좀 많았다. 그래도 일년 동안 생활할 공간인데 신축이라 깔끔하고 (학원이 현재 건물로 이사 온 첫 해였다) 나름 최상반이라는 하이퍼 반에 바로 넣어준대서 옳다쿠나 하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안심하라고, 열심히 해보이겠다고. 사실 스스로 해보이겠다는 건 아니고, 학원의 빡빡한 관리 아래에 많은 임무를 잘 수행해 보이겠다고. 원체 나태하고 수동적이니 그렇다고 욕해도 할 말은 없다만 실제로 그랬다. 내가 재수학원에서 제일 많이 썼던 말이 ‘시키는 대로는 뭐든 잘 하니 뭐든 던져만 주세요. 해내겠습니다. 그게 초 수동적인 제가 자랄 수 있는 양분입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선행반의 하이퍼반은 문이과 통합 한 반이었는데 이때의 담임선생님, 난 오로지 이 분만 바라보고 따라오느라 정규반 반까지 바꿨다. 공부한 적도 없으면서 항상 만점을 받던 언어, 담임선생님이 언어 담당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엄마는 걱정을 많이 했다. 반을 왜 바꾼거니, 넌 수학의 근본이 없기 때문에 수학선생님이 더 필요할텐데. 엄마를 안심시켜야 하는데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고, 그저 난 내 담임선생님을 그보다 더 큰 이유로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난 이 학원에서 버티기 위해 이 선생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맞다. 이 글의 본질적인 이유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우리 담임선생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내년에 너희들이 대학에 가면 지금 하는 공부의 10분의 1만 해도 A+는 따논 당상일 것이다, 라며, 마치 어린아이에게 구전동화를 읽어주시듯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가끔 귓가에 맴돈다. 그렇게 내 재수생활을 생각해보려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뭔가 뜯어낸 것처럼 그부분의 기억이 공백이 되어있다. 물론 풀로 접착되어 있던 부분이 희끗희끗 붙어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기억이 하얗게 타버렸다. 역시 이곳의 생활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구나, 란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슬프고 아쉽다. 내가 재수시절의 치열했던 기억을 이렇게나 잊을 줄이야. 그리고 그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담임선생님의 기억이 잊혀진다니! 이건 말이 안된다. 너무너무 죄송한 일이다. 담임선생님은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진짜 스승님을 만난다면 이런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수생에게 공부와 공부 외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 담임선생님은 공부는 둘째치고 공부 외적인 부분에 대해선 100% 커버가 가능하신 그런 분이셨다. 요즘 말로 멘탈 관리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일반적인 재수생의 멘탈은 쿠크다스는 한참 지나 그냥 그 자체가 바스라져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멘탈가루를 손으로 곱게 뭉쳐주시고 꾹꾹 다져주시는 분이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셨다. 방법은 다양하고, 특이하다. 누군가를 호명하거나, 아무 말 없이 어깨를 툭툭 치시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교무실에 따라가면 따뜻한 차 한잔이 기다리고 있다. 매일 종류도 달랐던, 각자 사연 있고 귀한 차들. 선생님의 인생의 짧지 않은 부분이 담긴 차 상자를 살짝 엿보기도 하고, 가끔은 과감히 교무실에 찾아가 차 한잔 달라고 하기도 했다. 이 사소한 행동이 재수생의 일상 속 작은 일탈이었다. 선생님이 개발해서 전매 특허로 사용하셨지만 어느샌가 학원 전체에 하나의 미덕으로 퍼진 ‘묵언’ 표찰이라던가. 사실 저 아직도 묵언 반납 안하고 가지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가끔씩 꺼내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앞서 나의 나태함을 가지고 길게 자학을 했던 이유는, 결국 난 저 어마무시한 학원에 들어가서도 수능날까지 게으름과 나태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성은 고치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 생활기록장만은 철저했다. 참 모순된 일이겠지만 이건 전적으로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이렇게라도 노력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보다 게으른 건 사실이었고 난 나태한 나와(이쯤되면 또 다른 자아라고 표현하고 싶어질 정도다) 싸우면서 포기하진 않았다고,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참 단순한 심리였다. 마치 유치원생의 심리처럼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길 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무살이나 먹은 내가 저렇게 사고회로가 단순하게 돌아갔는지 의문이냐마는, 막상 저 상황에 던져지면 그렇게 된다. 난 학원의 최상위 반인 하이퍼 반에 속해있어 자랑스럽고, 모든 학생들이 인정하는 가장 좋은 선생님을 담임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자랑스럽다. 그러니 내가 이 선생님께 인정받으면 그게 바로 삼위일체.
시간이 지나 수능을 보고, 난 대학을 붙어 일 년을 고군분투한 학원에서 떠나게 되었다. 학원엔 상당히 좋은 기억만이 남아있다. 물론 내 결과가 만족스러워서 일수도 있겠지만, 기억이 막 증발하는 와중에도 좋은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은 걸 보면 말이다. 내가 내 인생에서 ‘이 선택을 해서 정말 너무 다행이다!’라고 여기는 선택이 세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규반 반을 바꾸어 담임선생님을 따라올 수 있었던 점이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재수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미래겠지만, 뭐 나처럼 정말 운이 좋을 수 만 있다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경험이다. 수능 앞두고 이런 소리 한다고 돌 맞으려나...
밤이 늦으면 지나치게 감성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글이 너무 길어지니 이만 자야겠다. 마지막으로 황의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전히 글도 못쓰고 논술도 못써서 죄송해요. 쓰고나니 창피하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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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봤습니다
얼마 남지않은 수능 잘마무리 해야겠네여
저도 게으름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준비기간이였지만 게으름 이겨내고 공부한 제가 자랑스럽네요 수험생모두 좋은결과가있길 바랍니다!!
사실 긴 글을 읽을 때, 게다가 그것이 인터넷상이라면 더욱더 몰입을 잘 못하는데, 이 글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변에 휩쓸려서 준비했던 외고 입시 전쟁에서 패배한 것,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3년 내내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의고사 성적이 그냥 저냥 나와주었던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게으른 천성이 최대의 독이었던 N수 생활까지. 공감가는 부분이 정말 많아서요. 무엇보다도 N수 생활 중,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선생님이 학원에 계셨던 것까지.
이 글을 읽으니 이맘때쯤 작년에 나는 무얼하고 있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저도 새벽감성이라서 그런지 댓글도 저도 모르게 길어졌네요 ㅋㅋㅋㅋㅋ
엔피씨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